16/22 페이지 열람 중
희망의 내용 없음우리가 우리에게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더 많은 공기를 정화할더 많은 허파가 필요한오래된 세계에서더 많은 빙하를 녹일 더 많은 체온이더 많은 어둠을 흡착할 더 많은 악몽이더 많은 멸종을 지켜봐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오래된 세계에서사람인 채로 더이상망가지고 싶지 않아적막 속에 찾아오는 수치심은 아름다웠음몸을 떠난 살은 몸보다 먼저 썩었음희망의 내용 없음여러 겹의 몸을몸 위에 겹쳐지는 무수한 유령들을허물로 남겨두고밤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푸른 하늘 은하수 끝나지 않는 손장난밤이 기어이 밤을 어기…
(영상버전)https://youtu.be/UosfSCcornk정말 재밌게 본 단편 중 하나아래는 짤 버전이며, 혹시 영상으로 먼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위에 유튭 링크도 첨부한다.퍼온거라 사족이 많이 달려있지만 00년대 특유의 쌈마이 감성을 보는 맛이 또 있다
뒤늦은 대꾸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내내 함께 있어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밥 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보내고 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인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더,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할머니, 나 혼자도…
습작시대역광을 뚫고 느낌표 한 마리, 쿵쿵! 쿵! 나에게 왔다목 없는 드라이아이스가 김을 쏟으며 푸드덕 날아갔다광속으로 도는 창백한 팽이, 콘크리트 바닥을 뚫는다구멍난 상체를 일으키며 사격장 표적이 날 노려볼 때대가리를 틀어막은 코르크 마개들은 폭죽처럼 터졌다목마른 이파리를 흔들며 칼춤 추는 미친 나무들아저기 관을 뚫고 자라나는 건 머리칼이냐 뿌리냐?구워......버린 뱀이, 도막도막 달빛에 빛날 무렵땀구멍 없는 육신들은 발작적으로 술을 토하고취한 고참, 소반을 뒤집으며 착한 년의 뺨을 친다흙탕물 속에서 힐끗 잠수교가 드러나는 저 …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마리아 델 라 루스는 렌터카를 운전하면서 바르셀로나로 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모네그로스 사막 지역에서 자동차가 고장났다. 그녀는 아리땁고 말이 없는 27세 멕시코 여자였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여러 흥행물의 여배우로써 조금은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교장에서 일하는 마법사와 결혼을 했다. 그날 그녀는 사라고사에 있는 몇몇 친척을 방문한 후 남편을 만나려고 가던 중이었다. 폭풍 속을 빠르게 질주하는 화물차와 승용차들에게 한 시간 동안이나 초조하게 신호를 보내던 끝에 털털거리는 버스…
표적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녹기 위해 태어났다니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흰쥐, 한마리 흰쥐의 가여움흰쥐, 열마리 흰쥐의 징그러움흰쥐, 수백마리 흰쥐의 당연함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꿋꿋이 …
1 사흘전사흘밖에 남지 않았다.창밖은 가을이다. 남쪽으로 난 창으로 햇빛은 하루하루 깊이 안을 넘본다. 창가에 놓인 우단의자는 부드러운 잿빛이다. 그러나 손으로 우단천을 결과 반대방향으로 쓸면 슬쩍 녹두빛이 돈다. 처음엔 짙은 쑥생이었다. 그 의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0년 동안을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는 일이라곤 햇볕에 자신의 몸을 잿빛으로 바래는 일밖에 없다. 그건 처음부터 거기 있었고 처음부터 쓸모가 없었다.53년 봄이니까 아직 동란중이었다. 휴전설이 나돌면서 서울은 단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구도 오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봄이 오고 너는 갔다.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내가 빈 벌판을 헤맬 …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달라고 했다.남자가 가져온 인쇄물은 거미라기보다는 커다란 홍게처럼 보였다.새를 먹는 골리앗거미.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의 이름이다."이 완벽한 대칭 좀 봐.꼭 반으로 접어 찍어낸 것 같지 않아?"남자는 인쇄물 속의 골리앗거미를 노려보며 말했다."똑같이,똑같이 그려 줘.몸을 덮고 있는 이 보송보송한 털까지."남자가 원하는 것은 거미의 털이나 대칭으로 잘 뻗은 다리가 아니다.남자는 협각류의 외피를 원한다.거미가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될…
아버지는 자기를 화장하고 나면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워낙 자주 하는 사람이었어서 나는 무심코 그럴게요 하고 대답했었고 잠깐 이거 이상해,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의 유골함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버스 안에는 화장터 앞 정류장에서 함께 탔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울었거나 울고 있거나 울 것처럼 보였고 그들에 비하면 나는 도시락 가방을 안고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사람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