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단편소설] T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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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젤리언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5,608회 작성일 23-02-22 16:19본문
Theo
김소연
그 여름, 내가 홍콩에서 온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의 이름은 시오 청이었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 어렸고, 홍콩에서 꽤 유명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으며,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 파견 온 인턴이었다. 여름이 수명을 다할 때, 그는 내 누드 사진이 저장된 카메라를 들고 한국을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실 역시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의 친구들은 각자만의 방법으로 정상적인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이 끝나고, 추석을 지낸 뒤, 서른 살이라는 피켓을 들고 우리를 맞이할 겨울을 의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겨울을, 서른 살을, 이십 대의 끝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은밀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몇은 결혼을 준비했고, 또 몇은 동거를 선택했으며, 나머지는 소개팅에 열심히 나가거나 휴가를 몰아 쓰고 각종 축제에 몸을 던졌다. 나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십 대의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동안, 나와 내 친구들은 각자 몇 번의 연애를 시작하고,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연애를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위로하고, 그리고 꽤 자주 헤어짐을 번복하는 서로에게 질려하며 살아왔다. 우리에게 사랑은 우습게도 생존의 문제였기에, 늘 그것에 대해 말할 때면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서로를 위한 조언은 어떤 면에서는 비난과 닮아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날까 봐, 그래서 치열한 청문회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밀을 감추고 사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애, 시오가 나를 자신의 거처에 초대했다는 사실을, 더 정확히는 자신의 누드 모델이 되어달라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았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수락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내 기행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여름 나는 무언가가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매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치장이랄 것도 없이 집을 나서는 일. 푸르죽죽하게 익어가는 수풀을 건너 역으로 다다르는 일. 지하철 문짝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숨죽이는 일. 어두운 굴을 헤집고 또 헤집은 뒤 강남역 플랫폼에 토해지는 일. 출구로 나가기 위해 길고 긴 지하를 통과하는 일. 그 과정에서 또 매일같이, 수많은 아이돌 멤버의 생일 축하 전광판을 목격하는 일. 노트북 안에 빨려 들어갈 듯 목을 구부리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맞은편 건물 16층 외벽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새 둥지를 보고 코웃음 치는 일을 영영 중단하고 싶었다. 문제는 이백십만 원이었다. 매월 25일 통장으로 꽂히는 그 이백십만 원 덕분에 나는 하루에 1g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애매함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기에 내 재능은 애매하였다. 팔로워 1,726명, 그마저도 하루 평균 2명씩 줄어드는 나의 그림 계정. 벌써 수 년전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으나 그것이 전부인, 아주 애매한 유명세.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리에 앉아 펜을 들고 캐릭터의 눈알을, 귓불을, 꼬리를 채색한다. 꼬리를 둥글게 말고, 병원을 상징하는 심볼이 새겨진 모자를 쓴 그 다람쥐 캐릭터에서 나의 부분은, 그러니까 내가 기획한 부분은 오직 꼬리의 모양이다. 나머지는 어느 스웨덴 자선 단체의, 제대로 배워보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자랐을 어느 소년, 혹은 소녀의 작품일 것이다. 그런 일쯤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나는 더 많은 다람쥐와 생쥐와 족제비를 불법 포획하여 눈알이나 무늬 정도를 바꾸어 제출할수록, 회사에서 이야기하는 소정의 인센티브를 받게 되어있다. 업력 4년 차였던 그 회사는 날이 갈수록 빌딩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다. 내가 훔친 동물이나 요정이 들어간 제안서가 입찰에 성공할 때마다 대여하는 사무실의 숫자가 늘어난다.
시오는 로비에 앉아있다. 그는 그해 여름 입사한 인턴 중 유일한 동양인이다. 그는 인사 담당자의 안내를 기다리며 옆자리에 앉은 백인 여자의 가방을 쳐다보고 있다. 몇 시간 뒤, 팀장이 사무실로 인턴들을 데리고 들어와, 헤이 가이즈, 어텐션 플리즈, 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뿌연 태블릿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본다. 팀장이 내게 시오를 보낸다. 다른 인턴들, 자신을 애비게일, 루시, 한나, 오웬, 타일러라고 소개한 외국인들이 다른 동료들에게 간다. 시오가 내 자리로 걸어오는 그 잠시 간의 시간동안, 또 하나의 계절이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상기한다. 세 번의 인턴쉽이 진행될 동안, 아니, 그해 겨울까지 합해 총 네 번에 걸쳐서 팀장은 단 한 번도 서양인을 내게 보내지 않았다. 내가 영어를 할 수 있고, 준수한 스피킹 성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내게만 한국어로 이야기한다. 다른 동료들, 유학을 다녀왔거나 짧게라도 해외 인턴쉽 과정을 거친 팀원들은 그녀에게 올리버, 제시카, 샬롯, 리암이지만 나는 언제나 재하다.
그때 시오가 내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한다. “안녕합니까, 나는 시오입니다. 시오 청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요, 시오, 나는 에스미에요”, 라고 말한다. 시오가 내 가슴팍에 매달린 사원증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나는 고개를 돌려 팀장을 바라본다. 팀장은 나와 시오가 맞잡은 두 손을 흘깃 본다. 시오가 손을 놓기 전, 나의 손등에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살짝 스치며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만나 반가워요, 재하.”
나의 팀은 중식당 룸 하나를 빌려 점심 겸 인턴 환영회를 한다. 둥근 원형 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 짬뽕, 볶음밥이 차례로 오른다. 팀원들은 인턴들에게 왜 하필 우리 회사로 인턴쉽을 지원했는지 묻는다. 한국에서의 체류 계획과 여름 방학 기간, 그리고 여행 계획에 대해 질문한다.
시오는 영상과학 학부에 재학 중이며,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라고 말한다. 시오는 천천히 그 이름의 철자를 발음한다. “T-H-E-O.” 원래는 시오도르 이지만 줄여서 시오라고 부르면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교양 필수 과목으로 이수한 상업 디자인에 흥미를 느낀 것이 인턴쉽 지원 동기라고 말한다. 꽤 오랫동안 팬이었던 한국 연예인의 나라를 여행할 겸,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은 마이애미에서 온 올리버에 의해 중단된다. 올리버는 웃으며,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짜장면을 비비는 시오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시오는 짜장면은 중국 음식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중국의 작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것으로 그 어디에서도 작장면의 맛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한국식 요리라고 말한다. 나는 짜장면을 입에 넣고 시오의 이름을 발음해본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이름을 단무지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겨 보낸다. 맛이 조금 올드하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의 나는 스스로가 과연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 회사는 이전 회사에서 질식 직전,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단 마음으로 퉁겨져 착지한 결과인데 나의 삶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나는 그저 잠긴 문을 열고 나와 또다시 문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들어선 사람. 그저 어디엔가 멈춰 서있다는 자각 이외에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일 년에 두 번, 인턴들은 내게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눈을 빛내며 다가오고 환멸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불법 포획의 방법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불필요한 대화를 소거하기에는 언어의 장벽이라는 적절한 핑계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나를 싫어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동료들 또한 다를 바 없음을 안다. 내가 그들을 단 한 순간도 나의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그들은 내게 집요하게 의문을 가졌다.
그 여름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더 이상 간헐적으로 살의를 느끼지 않으며, 매달 25일 1g씩 줄어들지도 않는다.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살아내고 있다. 다리 하나를 건너고, 가파른 언덕 하나를 겨우 넘으려고 하고 있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고,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다. 벌어진 문틈 새로 길쭉한 인영이 스친다.
시오의 제안이 시작되기 전, 그에게서 내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무언가, 아마도 이상한 점이라고 불러야 할 무언가를 진작에 발견했다면 그만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 내리는 퇴근길, 가는 길이 겹친 시오와 나는 강남역 지하도를 걷고 있다. 빗물이 뚝뚝 흐르는 우산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걷는 인파 틈에,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시오는 내게 말한다. 자신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내가 필요하다고, 가능하다면 내가 모델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 모델은 반드시 네이키드여야 해요.”
그 이후, 회사에서 나는 시오를 의식한다. 자리에 앉아 내 몫의 낙타와 고양이를 그릴 때, 샐러드 1+1 광고나 중고 자동차 광고 배너에 음영을 넣을 때 그가 제안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해괴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던 홍콩 인턴의 표정을 상기하며 혹여나 그동안 내가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그것이 새로운 종류의 추파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만만해서 그러는 것인지 따져본다. 어느 쪽이든 불쾌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오에게 특별하게 대한 적 없다. 여느 인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시오에게 나의 업무 중 일부를 할당했다. 나는 그와 업무 이외의 소통을 한 적 없고, 비록 사내 메신저를 이용했지만 그의 질문에 충실히 답했다. 그가 들고 오는 레퍼런스들은 생각보다 수준이 높았고, 업무 처리 속도도 빨랐다. 내가 겪은 인턴 중 가장 높은 습득력을 가진 편이었다. 가끔 터무니없이 쉬운 문제를 들고 내 자리를 찾을 때가 있긴 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를 찾아가면 그는 대부분 자리에 없었고, 메신저로 연락하면 잠시 뒤 숨을 약간 헐떡이며 도착했다. ‘재하. 제가 도울 게 있어요?’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근무 시간에 빌딩에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노트북만 챙겨 근처 카페에서 일하거나, 일을 빨리 끝내놓고 근처에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시오의 인턴 기간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함께 입사한 인턴 동료들조차도. 그는 다른 인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회사 간식 창고에 삼삼오오 모여 컵라면을 먹거나 소시지 껍질을 벗기는 인턴 무리에 시오는 늘 없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인턴들의 성지로 불리는 덮밥 가게에도 시오는 가지 않았다. 회사가 마련한 인턴 참여 행사, 상품이나 상금이 걸린 일에는 얼굴을 비췄지만 그 외 잡다한 커뮤니티 활동에는 불참했다.
팀장은 내게 주기적으로 인턴 업무 진행 상황 공유를 요청했다. 나는 ‘업무 능력이나 처리 속도는 문제없으나,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거나 건물에서 사라짐’이라는 문장을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런 인턴을 맞닥뜨렸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은 사내 매뉴얼에 적혀있지 않았다.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다시, 빗물이 찰박거리는 지하도. 내가 불쑥 내뱉은 한국어에 시오는 잠시 침묵한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맥락으로 유추하는 표정이다. 내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다. 나는 어이없음과 황당함으로 굳은 눈으로 시오를 노려보고, 시오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급히 폰을 꺼내 든다. 직장인들이 화난 사람처럼 우리를 빠르게 스쳐 갔고 그중에는 내 옆자리 팀원도 있다. 시오는 천천히 대답한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해주면 좋겠어요.’
그제야 나는 시오를 본다. 홍콩의 작은 동네 타이항에서 왔다는 스물한 살짜리 남자를 본다. 그는 키가 크지만, 너무 마른 체형탓에 왜소해 보인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색 운동화에 끈은 언제나 양쪽이 다른 형광색. 불규칙하고 헐렁하게 끈을 묶고 매듭은 멋대로 짓는다. 튀지 않는 긴 양말, 아주 많이 헐렁해 보이는 통자 바지, 얇은 톰브라운 벨트, 휴양지 분위기가 나는 반소매 셔츠에 밤색 가죽 시계 차림이다. 질감이 도드라져 보이는, 숱 많은 짙은 눈썹과 튀어나온 눈썹뼈 그리고 살짝 넓은 광대. 얼굴에 비해 큰 귀가 각진 광대를 커버해주어서 크게 거슬리지 않는 모양새다. 눈썹만큼이나 길고 짙은 눈매, 동그랗고 낮은 코, 홀쭉하게 들어간 볼과 살짝 각진 턱, 전체적으로 그을린 피부. 은색 무테안경을 쓰면 그의 이국적인 생김새가 살짝 가려진다. 그는 나조차 잘 알지 못하는 한국 아이돌 멤버를 잘 알고 있고 오랫동안 그들을 동경해왔으며, 따라서 강남보다는 홍대에 더 어울리는 차림새로 회사에 나온다. 그의 한국어 발음은 몹시 어눌하고, 그가 영어 혹은 중국어를 발음할 때보다 한 톤 높게 갈라진다.
‘한국을 떠날 때, 당신의 나체를 가져가고 싶어요. 늘 그렇게 생각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들여다본다. 이제 곧 서른을 맞이할 여자를 본다. 알이 커다란 안경을 눌러쓰고, 제대로 빗지 않은 머리를 질끈 묶고, 매일 밤 술 모임에 나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농도 짙은 피로를 입은 스물아홉의 나를 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마르지도 육감적이지도 않은 몸선. 늘 접어 신어서 잘 펴지지도 않는 때 탄 운동화, 벌써 삼 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선물해준 워싱진, 품이 큰 티셔츠에 15분 느리게 흘러가는 손목시계. 건조하고 핏기 없는 입술, 이를 앙다무는 습관 탓에 침을 넘길 때마다 도드라지는 관자놀이. 나는 대체로 그런 차림으로 출근했고, 회사에서는 내 발 사이즈보다 2단계 큰 슬리퍼를 끌고 다녔다. 나의 어떤 지점이 그로 하여금 모델, 그중에서도 누드 모델을 연상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다. 나는 시오의 방에 갔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시오는 나를, 나체 상태인 나를 찍었다. 수백 장의 사진 중 몇 장을 골라 보정한 뒤 내게 건넸다. 그 사진들은 지금 내 작업실 안, 체리 원목 서랍장의 두 번째 칸에 있다. 발송되지 않은 편지 더미들과, 채색 직전 버려진 자화상, 옆구리 터진 물감 튜브, 깨진 안경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한쪽 무릎에 턱을 얹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무표정한 얼굴. 벽에 한쪽 몸을 기댄 채 뒤돌아 앉은 모습. 손가락 한 마디만큼 젖힌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빛이 닿는 이마와 어깨, 허벅지. 창백하고 밋밋한 등허리 위로 툭 불거진 날개뼈와 그사이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팔로 다리를 감싸고 웅크린 창백한 나체.
조금이라도 덥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불명예라는 듯 그 여름의 더위는 매일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친 듯이 비가 왔고, 또 미친 듯이 더웠으며 위태롭게 덜덜거리던 시오의 에어컨은 끝내 고장 나버렸다. 금요일 저녁,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의 한낮마다 우리는 서로의 방을 스튜디오처럼 썼다. 나는 서교동 낡은 골목 끝에 있는 시오의 방을 좋아했고, 시오는 응암동 시장 뒤편에 있는 내 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에어컨이 고장 나자, 시오는 나를 서교동에 초대하기를 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오의 방을 좋아했다. 드문드문 작은 카페가 있는 좁은 길,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따라 신산한 소리를 내는 초록이 우거져있는 골목. 그 길의 끝 집. 오토바이와 경차들이 불규칙하게 주차되어있고, 벽면에는 알 수 없는 그라피티가 어지러운 와중에 푸릇한 넝쿨이 벽이며 건물을 끌어안고 하늘로, 하수구로 곤두박질치는 정경. 시오의 방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일본인 여자가 운영하는 2층의 카페를 지나야 했다. 계단참에 솜이 다 튀어나온 가죽 소파가 덩그러니, 낮은 난간에 일본어가 희미하게 물든 풍등이 매달려 있고, 난간 빗금마다 작은 화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오의 방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 낀 선풍기를 튼 다음 그 애와 누워 여름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면 바람이 일본 여인의 허밍을 싣고 왔다.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시오는 물에 젖은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말한다.
“한국의 더위는 해결 방법이 없어. 살인적이야.”
나는 모로 누워 그의 콧잔등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런 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에어컨이 싫어. 그 냉기에 더 익숙해질까 봐 무서워. 어차피 밖은 살인적이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냉기의 노예가 되느니 더위에 살해당하겠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시오가 뭔가 알아냈다는 듯 읊조린다.
“그거 과연 사랑 같네.”
내가 음? 하고 반문하자 그가 티응 랑만 더, 라고 말한다. 나는 한참 뒤 그래, 꽤 낭만적이네, 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쯤 개의치 않고, 왼손에 몽땅한 콩테를 들고 시오의 의자에 앉아, 그 애를 그린다. 시오는 그런 나를 찍는다. 서로를 그리고 찍는 게 지겨워지면 초록이 얼룩진 창틀에 앉아 입 맞춘다. 5평 남짓한 우리의 스튜디오에 노을의 잔상이 맺혔다가 이내 저녁이 될 때까지. 거리로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의 발음을 흉내 내며 깔깔 웃는다. 못생긴 차고지 벽면에 발그레하게 피어내린 능소화 무리를 보고 한동안 멈춰 선다. 그 속에 시오를 세워두고, 내가 카메라를 든다. 시오가 설정한 값 그대로, 각도도 그대로 맞추었는데 초점이 나가거나 화각이 기울어진다. 나는 주변이 너무 어두운 탓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시오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시오와 함께하는 저녁과 주말이 반복될수록 친구들 모임에 여러 번 불참한다. 내가 그들을 아끼는 만큼 나는 시오를 비밀에 부친다. 그러나 그녀들과 나 사이의 절대적 룰을 깨지는 못한다. 본인 혹은 5촌 이내 친척의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이 아닌 이상 생일 파티에 꼭 참석할 것. 한 자리에 모여, 맥주와 샴페인을 따고, 선물을 건네고, 그것을 입거나 먹거나 발라본 뒤 왁자지껄하게 떠든다. 나는 조금 들뜨고, 취해서 시오에 대해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애의 안쓰럽도록 마른 몸에 대해서. 토끼 이빨처럼 크고 하얀 앞니에 대해서. 카메라를 드는 손 모양에 대해서. 그 애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온도에 대해서. 한쪽 눈을 감고 뷰파인더로 나를 볼 때, 그 애가 망설이거나 결정할 때 짓는 표정에 대해서. 홍콩의 네온사인을 179가지 버전으로 찍을 수 있는 그 애의 창의력에 대해서. 한동안 질리도록 국수만 먹으며 노인의, 사람의 얼굴들을 찍고 다녔다는 집요함에 대해서.
‘나는 모델이 아니라, 저 회사 디자인팀 직원이에요. 비록 여름 동안이지만 시오의 인턴쉽을 이끌 멘토고요. 안 지 2주밖에 안 된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알아요. 재하. 그럼 이건 어때요.’
‘…….’
‘14일 밤낮을 꼬박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해줄 수는 없을까요?’
세 번의 연애를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점이라면, 나는 사랑 앞에 아주 쉽게 바보 천치가 되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 보편적인 현상임을 안다. 경계하고, 관찰하고, 믿음을 요구하고, 확답받고, 때로는 석연치 않은 대답이 돌아오고, 답답해 몸을 비틀면서 격랑에 휘말리는 수순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무의식 너머의 어느 차원에서 간절하게 이별 시그널을 보내고 있음을 알면서도 푸른 수염의 아내처럼 될까 두려워한 시간을 언제부터인가 애도해왔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푸른 수염, 하늘 수염, 민트 수염을 찾아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 아니 어쩌면 내가 또 다른 푸른 수염일지도 모른다는 반쪽짜리 진실을.
가혹한 백야의 도시를 떠나 그 애와 나는 남쪽으로 간다. 유리의 첨탑에 몸을 숨기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는 맹인들을 뒤로한다. 초고속 열차를 타고, 사력을 다해 여름의 궤적을 그으며 내려간다. 막막한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간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 간다. 사랑과 죽음이 해풍을 비집고 콧속으로 침범하는 나의 고향으로 간다. 역전의 걸인들과 화난 노인들,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시위 무리는 그러나 우리의 일이 아니다.
사정없이 덜컹대는 마을버스를 타고 수평선 언덕을 지난다. 갈매기 똥이 덕지덕지 붙은 테드라포드를 지나고, 구불구불한 어촌 골목을 헤집는다. 털이 비죽 솟은 바다 고양이들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시오를 발견하고 등을 세운다. 나는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연다. 끼익 소리를 내며 빨간 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툇마루에 앉아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 크게 베어 물던 아버지가 억, 소리를 내며 그것을 도로 뱉는다. 조금 전까지 목침 대신 썼을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손을 닦고, 내 손에 든 과일 봉지를 받아든다. 아버지는 봉지 속 복숭아 개수를 다 세고 난 다음에야 시오를 본다. 아버지는, 임마는 또 뭔 놈이고? 라는 듯이 눈을 굴리며 대답을 보채온다. 나는 시오와 함께 수돗가에서 손과 발을 꼼꼼히 씻은 뒤 그 애를 데리고 나의 방으로 간다. 나란히 서서, 실패한 화가의 작업실 겸 침실을 들여다본다. 그의 서교동 공간보다 작은 방안에 캔버스 더미와 부러진 이젤이 무덤처럼 놓여있다. 시오는 좁은 방을 사방으로 쏘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인 캔버스와 햇빛의 각도만큼 색바랜 상장, 초라하게 반짝이는 트로피, 몽땅 연필로 채워진 어항과 벽에 붙은 아이돌 브로마이드를 손끝으로 만져본다. 탈탈거리는 선풍기를 틀고 창문을 활짝 열자, 아릿한 유화 냄새가 햇볕으로 배어든다. 책상 밑에 눕혀둔 30호 크기 그림을 가리키며 시오가 말한다.
“이런 거 하나 그리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려?”
“예전에는, 야작까지 하면 딱 열흘.”
“지금은?”
“안 그린 지 오래돼서 모르겠네.”
시오는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한껏 고개를 숙이고, 책상 밑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암호라도 찾는 것처럼 꼼꼼히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코를 갖다 대고 냄새 맡는다. 그는 여전히 그림에 몸을 붙인 채로, 나를 보며 말한다. 이제 나는 정했어. 한국에서 뭘 하다 왔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거야. 어떤 화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야. 내가 한눈에 알아봤다고,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으스댈 거야. 시간이 흐른 뒤에 너는 홍콩 사람들도 다 알만큼 유명한 작가가 되고, 나는 아이돌만큼 유명한 사진가가 돼. 나는 네 전시회에 가서 큰 소리로 말할 거야. 내가 이 그림을 최초로 발견한 홍콩인이라고. 그러니 한 가지만 약속해줘. 멈추지 않겠다고 맹세해줘. 그래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게 해줘.
바깥에서 한낮이 지나가는 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방 한가운데 눕고, 몸을 둥글게 만 뒤, 데구르르 굴러 내 침실로 안착한다. 시오는 먼지 묻은 창틀 아래 앉아 내 앨범을 한 장씩 넘긴다. ‘이건 언제야? 그럼, 이건?’ 시오는 묻고, 나는 눈을 찡그리며 대답한다. 시오의 곱슬머리 위로 먼지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그 애는 나의 십 대가 어땠는지, 유년은 어땠는지, 또 20대의 처음은 어땠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면 나는 울었어, 이 방에서, 내내, 라고 답한다. ‘베개가 다 젖고, 잠옷이 다 젖을 만큼 눈물을 퐁퐁 흘려댔지. 이 방은 내 슬픔의 목격자들로 가득해.’
시오는 카메라를 들고 내 옆에 모로 누워서 사진을 한 장씩 넘긴다. 그 애는 자신의 메모리 카드가 무한대 용량을 자랑하는데 사실은 미래 제조품이라는 우스운 소리를 늘어놓는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이며, 이제껏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시오 청 작가의 초기 작품과 생애를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라고 설명한다. 나는 시오의 팔을 베고 누워, 어쩌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순간, 10번째 생일 케이크 촛불을 불던 순간, 그림을 그려 처음으로 상을 받던 순간, 엄마의 염을 보고 목놓아 울던 순간, 아버지의 애인과 아버지를 저주하며 연필을 깎던 순간,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입 맞추던 순간에 찍거나 찍혔을 사진들을 본다. 그 애를 반반씩 옮겨놓은 어미와 아비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갓난 시오를 본다. 나지막한 사원 앞, 쥐색 비단옷을 입고 서서 함빡 웃는 아기 시오를 본다. 어지러운 축제 행렬 한가운데, 아버지 어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꼬마 시오를 본다. 부모님의 자동차 부품가게 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떼쓰는 일곱 살 시오와, 같은 해 겨울 발리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시오를 본다. 나는 수마를 느낄 틈도 없이, 사진들은 어느새,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느 먼 옛날 최초의 극장 스크린에 떠 있고,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또 무언가가 탁, 하고 걸리는 소리와 함께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끝이 어색하게 갈라지는 시오의 영어 목소리가 먼 곳에서 메아리치고, 이따금 선명하게 귀에 박혀온다. 부모님의 가게는 바닷가 가까이에 있고, 외동으로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시오는 살며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온다. 원형 미로처럼 생긴 아파트의 중간층, 빙글빙글 돌아가는 복도의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선다. 빛이 둥글게 쏟아지는 핑크빛 아파트와 파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으니, 위잉 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지나간다. 시오는 한 층을 빙그르르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한층 한층 내려갈수록 그는 자란다. 키가 훌쩍 큰 시오는 교복을 입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최신 기종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매고 길을 나선다. 조악한 간판이 붙은 노점상을 지나고, 단골 국숫집이 있는 골목을 돌아, 해변에 있는 부모님 가게에 도착한다. 시오의 어머니는 전화를 받으며 어딘가로 가고, 시오는 아버지와 함께 가게를 지키며, 소파에 앉아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가게를 기웃거리는 들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청년 시오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막 잠에 빠져든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5주년이었고, 얼마 뒤 남편이 될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우리는 룸서비스를 시켜 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쳤고,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침대에 누웠다. 나름대로 긴장하고 지친 하루였는지, 그는 얼마 뒤 곤한 숨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끌어 올려 그에게 덮어주던 순간이었다. 그 애가, 그 여름이 스친 것이.
시오가 홍콩으로 돌아간 뒤, 나는 몇 번이나 그를 마주쳤다. 길거리에서 종종 들려오는 중국인들의 수다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외국인 클라이언트 목록에서, 미술관 벽에 걸린 사진전 현수막에서. 몇 번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또 몇 번의 여름이 덧대어지며 내게 시오는 갈수록 희미해져 갔지만 나는 모르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가던 내 방 안, 그가 내 귀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속삭일 때. 핑크 미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골목을 지나고, 단골 국숫집도 지나고, 부모님의 가게에 도착해, 막 전화를 받으러 나간 어머니를 쫓아간 곳에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포옹하던 순간을 보여주는 순간에,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은 오직 나만 알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깥을 바라보며, 내 작업실의 체리 원목 서랍장 속 사진들을 어떻게 해야할 지 잠시 고민하지만 밤이 너무 늦었고, 내게 시간은 충분하니, 결정을 하루만 더 미루기로 한다.
73매. 끝.
22.08.24
댓글목록
지지님의 댓글
지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분량을 보고 제대로 읽기 위해서 모든 초대권 배포를 잠시 미뤄두고 시간내서 읽어봤네요, 결론적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랑만은 잊혀지지도 버려지지도 않고 옅게 묻어둔 채로 평생 가져가는 것 같아요.
젤리언니님의 댓글의 댓글
젤리언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