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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뛰고 있었다 /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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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준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03회 작성일 22-01-25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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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뛰고있었다. 아니, 적어도 빨리 걷고 있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보여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깨닫는 중이었다.

 '현준아, 여기선 무조건 앞만 보고 걸어야 돼. 그리고 누가 말걸면 그냥 대답하지마. 그냥 빨리 걸어'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형네 집에서 다 식은 라면을 뒤적거리면서 뉴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선 조금 억울했다. 좋은 풍경을 보고 거리의 모든 디테일을 눈에 담기 위해 온 여행인데. 앞만 보고 걸으라니.

 하지만 지하철을 두어번 타보고 나서 형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경찰 두 명과 몸싸움을 벌이는 노숙자를 보며, 피자집 앞에서 치고 받고 싸우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경찰과 구급대원이 쓰러진 사람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워주는 풍경을 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이내 발걸음을 재촉하는 법을 배웠다.

 내 발걸음이 무척이나 빨라진지 2주가 지나고, 전시가 보고싶어져 미술관에 갔다. 1층에서 티켓을 끊고 거대한 화이트 큐브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또렷한 변화 하나를 느꼈다. '내가 여기선 빠르게 걸을 필요가 없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몸의 긴장을 풀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을 걸었다. 전시장에선 느리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전시의 반의 반도 못 봤다. 전시를 다 보고나서 발걸음을 재촉해 뉴욕의 밤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갔다. 도착한 숙소의 문을 열려다가 담배를 하나 태운다. 한 모금을 들이 마시다가 생각한다. '며칠이 걸리든 간에 전시장의 모든 그림을 다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날에도 또 전시장에 들어가 빠른 걸음으로 전시장에 들어가, 느린 걸음으로 전시를 봤다. 그리고 그 다음날, 3일차가 되는 마지막날, 무인 매표소에서 티켓을 뽑으려다가 문득 다른 색의 티켓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오스크 앞에서 1분 정도를 서있다가, 매표소 직원 앞으로 걸어갔다. 


"제가 오늘 3일째 보는데, 혹시 다른 색의 티켓으로 발권 가능하실까요?"

"당연히 가능하죠, 잠시만요"

직원분은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다른 색의 티켓을 뽑아줬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티켓을 건네주며 말했다.

"3일차라면, 티켓은 저희가 무료로 드릴게요."

티켓을 받은 나는 동양식 90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외치며 전시장에 들어갔고 전시 마감 직전까지 있다가 나왔다.

 모든 전시를 다 봤다는 뿌듯함과 함께 전시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내 걸음걸이가 전보다 느려졌음을 느꼈다. 나는 원래 어디서나 이방인이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이왕 그렇게 된 거, 걷는 발걸음을 더 늦추기로 한다.

 이제 거리는 내 전시장이 되었다. 건물 사이사이의 골목길이, 거리에 있는 작은 광고판들이,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시던 환경 미화원의 모습이 작품이 되더라.

 혼자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빨리 걸으라 조언했던 형이 문득 떠올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여기서 천천히 걸어도 괜찮나봐. 따위의 말을 하고싶었다.

 뚜- 뚜- 하는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여보세요? 형!"

"형?"


뚜- 하는 신호음이 대신 대답했다. 아, 받은게 아니었구나. 잠시 후 이제야 받은건가 싶어 다시 불러봤다.


"형"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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