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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너브리 이름으로 검색 댓글 1건 조회 1,734회 작성일 22-01-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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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피어오른다.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K은 잠결에 눈을 떴다. 통통통. 아마도 호박 같은 걸 썰고 있는 것 같다. 무기력한 채로 누워서 후각과 청각에만 집중하고 있다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따뜻함. K가 L에게서 느낀 감정은 아마도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K는 L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서 더 좋아했다. 무기력하게 허공을 떠다니는 K의 영혼은 L의 뒷모습을 볼 때 잠시 메여 쉴수 있었다. K은 그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로 존재해야 했다. 


K와 L은 같이 밥을 먹고 체온을 나눴다. 아침에 헤어져도 저녁에 만날 것이라는 걸 혹은 그 주 어느 날에 다시 함께 저녁을 먹으리란 걸 암묵적으로 믿는 사이였다. K는 L의 관찰자였고 L은 K를 위한 행위자였다. K는 L의 존재에 기대 자신을 세웠다. 


다만 K는 그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K는 L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가도 모든 것이 속박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그래서 K은 스스로의 목에 굴레를 씌웠다가 벗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K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고 서로간에 공공연한 것이기도 했다. 둘은 연인에 가까운 것과 친구에 가까운 것 사이를 종종 오갔다. 


그러다 어느 날 K는 새로운 향에 사로잡히고 만다. J에게서는 패츌리와 레몬그라스향이 났다. 수분을 머금은 흙의 내음과 상큼함이 섞여 절간에서의 아침을 연상시키는 향이였다. K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향기가 자신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어느 날 K와 J는 함께 담배를 태웠다. K는 담배가 문득 피고 싶었고 J는 K에게 담배를 주었고 K는 콜록였고 J는 말없이 자신의 담배를 태웠다. K는 J와 담배를 필 때 흘러들어오는 정막을 좋아했다. 그것은 가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명한 막 뒤에서 자신이 얼마나 건강하고 멋진 사람인지 전시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망가진 채 마주하는 것이었고 해방감이자 안락함이었다. L과 K는 커피를 마시고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K는 L에게 이별을 고했다. 3개월 후 L이 아프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도 K는 확고했다. 그 날은 그 해 첫 눈이 오는 날이였다. 차가운 날이었다. L은 마지막으로 K를 붙잡았고 K는 울부짖으며 돌아섰다. 그것은 K가 자신을 사랑한 존재에 대한 배신이자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었다. K는 L에게서 자신을 찾다가 J에게서 찾고 싶어서 L을 버렸다. 


1년 동안 K는 L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그 다음 해엔 고마움을 느꼈다. 그 후에도 K는 L를 종종 생각하곤 했다. 우연히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L이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걸어가는 모습을 본 날에도 K는 L의 행복을 빌었다. L이 가정을 꾸렸을 때에도 L에게 아이가 생겼을 때에도 K는 L의 행복을 빌었다. 그렇게 K는 자신만의 참회를 이어갔다. 


K는 몇 년간 자신이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가볍게는 친절, 박애 등으로 조금 깊게는 우정, 연대 등으로 그보다 진지하게는 사랑으로 불렸다. K는 타인을 만족시키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거울을 손에 들고 타인에게 타인의 모습만 되돌려주면서 지냈다. 그것은 K가 K 자신을 마주하는 것보다 수월한 방법이었다. K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숨어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했다. 


그러다 K는 자신과 비슷한 M을 만난다. 거울을 들고 있는 사람. M과 K는 다가올 땐 서로 다가가고 뒷걸음질 칠 땐 서로 화들짝 물러서길 반복했다. 요구할 땐 '나도 그게 좋아.' 라며 이견이 없고 맞춰줄 땐 '너는 뭐가 좋은데?' 라고 물으며 결론이 나지 않는 날이 반복되었다. 거울을 마주들고서 투명한 방이 무한히 반복되는 사이. 거울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사이. 


K는 거울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건강한 것, 멋진 것, 아름다운 것 따위로 휘감아진 마네킹을 세워두고 숨으면 M도, K도 알아차렸다. 때늦은 고통이 한 번에 밀려왔다. 곪은 것, 미숙한 것, 요동치는 것을 내보일 수 있어야 했다. 벗거 벗은 느낌이 주는 수치심은 대단했지만 서로 한꺼풀씩 내려놓는 과정은 유대감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K는 거울을 돌려 자신을 마주할 용기를 냈다. 


사람. 거울에서 마주한 K는 그저 사람이었다. 마주한들 별 다를 것은 없었다. 변신하는 만화 주인공 처럼 빛나는 것 따위 없는 그렇지만 유일무이한 그냥 사람. K는 그냥 자신을 잘 데리고 살아주기로 했다. 아이가 어딘가 좀 모자라도 그냥 손잡고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K는 여전히 종종 L을 생각한다. 미숙하고 불안한 것이 만나 솔직했던 날들. 그래서 더 엉망이었던 사이. 한계를 가진 채 나날이 벌어지던 현재를 시간이 잘 꿰매어 과거로 남겨준 곳. 돌이킬 수 없고 다시 살수 없기에 완전해진 눈 내린던 날의 기억. K는 그날의 차가운 공기를 오감으로 되새기며 그만의 장송곡을 마쳤다. 모든 것은 눈 속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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