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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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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준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3,862회 작성일 21-12-13 21:42

본문

나는 너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것은 어떠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했지만

나는 껍질만 질겅질겅 씹어삼킬 수 있는 정도의 언어만을 구사하고

껍질만 만지고 껍질만 찾아헤매던 사람이었기에

언어라는 것과 능숙하지 못했기에

나의 사랑은 본의아니게도 이상한 단어로 출력되곤 했다.

혹은 이상한 행동으로 표현되곤 했다.

언젠가 잠들기 전에

누군가의 죽음을 곱씹고

그것을 생각 속에서 저멀리 구경하다가

너도 언젠간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언어는 말할줄을 몰랐다.

급박해진 내가 너의 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들고 너에게 속삭인 단어는

'죽지마'라는 멍청한 단어였다.

하지만 너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니까.

다행이다 느끼며, 내가 이상한 말을 내뱉어도

껍질만 남겨 씹다 뱉은 듯한 단어들만 나열해도

너는 껍질에 남은 알맹이를 굳이 찾아

나와 함께 나눠먹을 수 있던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게 너와 생각을 나눈다.

다음날에야 조금 머쓱해진 나는

너의 연락에 또 다시 껍질만을 읊조린다.

너는 알맹이를 읊조리지만

껍질만 보고 껍질만 찾아헤메던 나와의 대화이기에

너의 알맹이는 점점 껍질로 환원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잘못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린 서로 미워하는 법만 배웠다.

우린 서로를 상처주는 법을 배웠다.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너도 사실은

껍질만 질겅질겅 씹으며

알맹이를 두려워 하던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우리가 배운 것들 중에

가장 쉬이 할 수 있는 것들만 한다.

너도 우리가 배운 것들 중에

가장 쉬이 할 수 있는 것들만 한다.

껍질만 질겅질겅 씹어삼키던 우리는

미워하는 법만 남긴채로

잠에 든다.

추천3

댓글목록

지지님의 댓글

profile_image 지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랑은 종종, 아니 자주 이상한 단어로 출력되지?
껍질만 질겅질겅, 빙빙 돌아 바깥만 더듬으며 이야기 한다고 해도 사실은 그 내용물도 알 수 있었어. 간단해. 그 껍데기들을 모아서 퍼즐을 맞추다 보면 그 내용물의 형태가 어렴풋 드러나니까?
껍질만 씹는 것이 배운 것 중 가장 쉬운 표현의 방법이었을 텐데, 결국은 가장 어려운 방법이었다. 알맹이를 그대로 말하는게 사실 가장 쉬운 방법이었는데, 우리는 배운 것 중 가장 어렵게 할 수 있는 것들만 했구나.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냐. 그리고 우리는 미워하는 법을 배운게 아냐. 상처주는 법도 배운게 아냐.
우리는 미워하고 나면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상처주고 나면 보듬어주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그렇게 자라서 만나자. -끝-

너브리님의 댓글

profile_image 너브리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아포토스*로서의 타자는 언어를 뒤흔든다. 그에 관하여, 그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러우며, 서투르고 민망하다 [......]."
* 아포토스. 장소가 없는, 무소적인
- 책,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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