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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야기 / WRITINGS & STORIES

이상-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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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양희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164회 작성일 19-09-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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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藥水)보다도 약주(藥酒)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몸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 짐작으로 화인(火印) 한 되는 쏟았지만 일주일을 버티셨습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救)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발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 숭늉 모두가 약 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누이를 폐환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미신이구나 하고 병을 들고 악발골로 가서 한 병 얻어가지고 오는 길에 그 친구 집에 들러서 내일은 우리 집에 초상이 날 것 같으니 사퇴(仕退) 시간에 좀 들러달라고 그래 놓고 왔습니다.

백부께서는 혼란된 의식 가운데서도 이 약물을 아마 한 종발이나 잡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운명(殞命)하셨습니다.

임종을 마치고 나는 뒷곁으로 가서 오월 속에서 잉잉거리는 벌떼 파리떼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물진 작약꽃 이파리 하나가 많이 졌습니다.

이키! 하고 나는 가만히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또 술이 시작입니다.

백부는 공연히 약물을 잡수시게 해서 그랬느니 마니 하고 자꾸 후회를 하시길래 나는 듣기 싫어서 자꾸 술을 먹었습니다.

'세 분 손님 약주 잡수세요' 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그 목노집 마당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우러져서 서성거리는 맛이란 굴비나 암치를 먹어가면서 약물을 퍼먹고 급기해 하여 배탈이 나고 그만두는 프래그머티즘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술이나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사는 몸이오'하고 얼러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 얘―이건 참 땡이로구나 하고 삼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 여자는 삼년 동안이나 같이 살아도 이 사람은 그저 세계에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고 그만둔 모양입니다.

게으르지 않으면 부지런히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게 또 마음에 안 맞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병이 나서 신애―로 앓으면서 나더러 약 물을 떠오라길래 그것은 미신이라고 그랬더니 뾰루퉁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가버린 것은 내가 약물을 안 길어다 주었대서 그런 것 같은데 또 내가 '약주'만 밤낮 먹으러 다니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하여간 나는 지금 세상이 시들해져서 그날그날이 짐짐한데 술 따로 안주 따로 판다는 목노조합 결의(決議)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못 견디겠습니다.

누가 술만 끊으면 내 위해 주마고 그러지만 세상에 약물 안 먹어도 사람이 살겠거니와 술 안 먹고 못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이 게시물은 해적선장왕킹짱님에 의해 2020-03-05 01:00:21 영상, 음악 / VIDEO&MUSIC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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