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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 김리윤 - 평범한 대낮의 밝음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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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18회 작성일 23-06-1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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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낮의 밝음*



횃불은 광원으로서 복도나 방에 빛을 던지기 위해 발명되었다**

사전을 읽으며 먼 옛날의 조도를 상상한다


발화와 동시에 현재를 지나치는 말

걸음을 떼는 순간 지나간 자리가 되어버리는 위치


꺼지지 않고 커지지 않는 무언가를 녹이지도 태워버리지도 않는 피운 위치로부터 멀리 더 멀리 가도 낡지 않고 닳지 않는

손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한 불*** 속에서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이 구불구불 멈춰 있다


검은 책을 받아 든 사람은 조금 다른 검정을, 더 검은 검정을 원한다고 했다

검은 종이 열 장을 놓고 보면 모두 다르게 캄캄하다고


하지만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이보다 더 검은색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더 완전한 캄캄함을 상상할 수 없어요

어떤 밤에도 켜진 불빛들이 하나, 둘…… 무수히 끼어들지요


도시는 빛을 감추기에 좋고 원한다면 어떤 빛도 눈여겨보지 않기에 좋다

빛은 어떻게든 숨어든다


미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간의 이름이다

종말은 미래보다 상상하기 쉽다


끝장에는 모레도 너무 멀어 내일이 좋아


절반은 유품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부서진 뼈 위로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새해가 오면 신년 운세를 보고

한 계절이 또 한 계절이 지난 후를 점치며

우리를 기다리는 좋은 일을,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고 싶어지지


형광등이 켜진 방보다

어둠 속에 알알이 박힌 빛 표표히 서 있는 빛 흔들리는 빛 점멸하다 다시 나타나는 빛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빛

그런 빛에 마음이 기울도록 설계된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아주 환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매일 한 쌍의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캄캄하게 닫힌 눈꺼풀 사이로 유입되는 분량의 빛

속에서 아침은 시작되는 것이다


문을 열자 강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우리는 물과 불 중 하나를 다시 발명해야 했다



*'몇십 년 전에는 미래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어두워 보였지만, 우리는 평범한 대낮의 밝음 속에서 그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설준규 옮김, 창비, 2017)

**위키피디아 '횃불' 문서 참조

***같은 글 참조

**** 1969년 6월 22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오염된 쿠야호가강 수면의 기름으로 인해 강물에 불이 붙어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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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느낌이다*



우리가 이 날씨를 다 망쳐버렸어

이렇게 말하면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것 같다


말간 햇빛이 정수리로 부드럽게 쏟아지고 엉덩이에 풀물이 들도록 잔디밭에 앉아 있을 법한 날씨 벤치에 앉아 개가 참 많다 저 많은 개들이 모두 행복해 보인다 감탄하게 되고 개들은 바쁘고 바쁜 개들의 까맣고 촉촉한 코 위로 미끄러지는 햇빛을 하염없이 쫓아가고 싶은 날씨


우리는 어두운 카페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본다

물이 찬 두 쌍의 신발 속에서

허옇게 붓고 있는 발을 나란히 하고

눅눅한 티셔츠를 입고


함께 있다고 느끼면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 유령처럼

아직 더 망칠 날씨가 있다는 느낌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망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

준비된 솜씨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 데려오는 시간과

나란히 앉아 창문 밖 스크린을 본다


조감도 속 완벽한 날씨를 봐

저렇게 결정된 풍경은 도무지 풍경처럼 보이질 않고

날씨를 모르는 사람이 상상한 날씨가

구현된 날씨의 이미지가 날씨를 덮고 있는 것 같지

덮인 날씨 위로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같지


어제는 종이로 무엇이든 접을 수 있다는 사람의 영상을 뭐에 홀린 것처럼 봤어 종이접기의 신이라는 사람 얇고 평평한 물성 접힐수록 더욱 자라나는 부피 열 개의 손가락에서 시작되는 세계

더 망칠 것도 없을 날씨 한 번이면 곤죽이 될 세계를


보호하고 싶은 장소엔 출입통제선 대신 종이로 접은 것들을 두면 된다고

손가락 하나로 망쳐버릴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을 그냥 밟고 지나갈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손을 움직이는 사람을


여길 화사하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지?

불씨 하나를 톡 던져 넣으면 환해지는 아궁이 같은 것이라면

불타오르며 밝아오는 날들로 충분하다면


창문 좀 열어봐

우리가 망칠 수도 있는 날씨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뭐에 홀린 듯한 산책을 생활이 없는 듯한 산책을 하게 되고 개들은 혼자 남은 집에서 가족을 기다리는 법을 다 잊어버릴 것 같은 그래도 상관이 없을 날씨


물이 들어찬 신발 속에서

무엇도 밟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물러가는 발 허물어지는 발

부드러운 발바닥이 닿아본 전부인 것 같은

조그맣지도 않은 발


정말 사랑하니까 망치기 쉬운 것들을 많이 주고 싶을 거야

우리를 가장 사랑했던 신이 죽기 전 우리 앞으로 남겨준 상자는

종이로 만든 것이고

그 위에는 종이로 만든 꽃 한송이 올려져 있어


손댈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



*Yvonne Rainer, Feeling Are Facts, The MIT Press, 2013



-----



이야기를 깨뜨리기*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친구들아


실패하지 않는 사랑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이런 것만이 우리의 소원은 아닐 거야


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


슬픔을 깨트리며 슬픔을 기억하기

미래의 불행을 미리 깨트리기


깨진 컵을 버리는 여자들과

새 컵을 찬장에 채워 넣는 여자들

우리는 와장창 웃으며 미래로 간다


세상에는 검은 모래의 해변도 있어

백사장이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래를 뭐라고 부를까 골몰할 수 있었겠지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다

뒤로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지네**

우리는 어떤 인과도 배운 적 없는 사람들처럼

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걷고 웃고 먹고 잠드네


바깥의 여름 속을 걸으면 더위의 인과를 묻고 싶어져

정말 덥다

여름이니까 덥지

이런 대답 대신


새롭게 열리는 땀방울을

이상한 질감의 피부와 미친 햇빛을

앞사람의 손에 들린 봉지 속에서 흔들리는 복숭아 두 알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 둘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을 본다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

여름 바람이 반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는 것을 본다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

먼지 속에 숨을 수도 없이 환한 여름에

드러난 사랑의 부스러기들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모두 얼굴이라고 불러왔네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



*리베카 솔닛,UC버클리 저널리즘 대학원 졸업식 축사

**유대인 결혼식에는 식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리잔을 바닥에 놓고 신랑이 오른발로 밟아 깨뜨리는 풍습이 있다. 『탈무드』에서 기인한 이 풍습에는 깨어진 유리잔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결혼임을 상징하는 것, 예루살렘 성전 붕괴의 슬픔을 기억하는 것, 큰 소리를 냄으로써 악마들을 만족하게 해 결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질 것이다.'(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바다출판사,2020)



-----



물기둥



어쩜 이렇게 생겼을까

이상한 이마 신기한 눈썹 말도 안 되는 입술

인간은 사랑하는 이목구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내가 만들다니

그런 마음으로는

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손님은 누군가 꽃을 그렸더니 나비가 날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시선은 사물의 표면을 미끄러지면서 간다* 우리보다 빨리

발도 없고 날개도 없는 것처럼 더 미끄러운 피부만이 필요한 것처럼


천사의 뼈와 살도 담길 피부가 필요하겠지

손님들은 물컵을 놓고 작은 식탁에 둘러앉는다

물속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눈은 자신이 컵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중이라고 느낀다


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물에게는 정말 컵이 필요해 보였지


너는 식탁에 복슬복슬한 턱을 괴고 나를 본다

쟨 가끔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니까요 곧 말도 할 것 같지 않아요?

손님들은 와르르 웃는다


네가 하하하 소리 내 웃는 악몽을 꿨어

하얀 털로 뒤덮인 턱을 젖히고 목젖을 흔들면서

네발로 걸으면서


던진 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밤의 검고 매끈한 수면은 강변 농구 코트의 우레탄 바닥과 혼동된다


밤마다 천사들은 바쁘게 날아다니고

매일 부숴야 할 것이 참 많구나


천사의 도끼는 얼마나 무겁고 날카로운지

어렵게 부서지는 물질은 천사의 의욕을 고취시킨다


밤이면 날갯죽지를 근육통에 시달리게 하고

아침이면 싱크대 밑에서 쉬고 있는 도끼 한 자루

도끼날은 세계의 빛을 다 모아둔 모서리처럼

세계의 모서리를 모두 찾아내 낱낱이 번쩍이게 할 것처럼 빛난다


도리 아래에서 부서지는 밤은 보시기에 낮과 다르지 않았다


아침은 밝아온다고 쓰는 것이 문법에 맞다

어떻게 하루가 온다 해도

표면이란 시선에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옷을 뒤집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표피를 매끄럽게 스쳐 나아갈 뿐이다'(버지니아 울프 『런던 거리 헤매기』,이미애 옮김,민음사,2019)

**에마뉘엘 레비나스,『전체성과 무한』,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그린비,2018



-----



사물은 우리를 반대한다*



너희는 언제까지 마냥 사랑만 할 거니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면 거기 열린 것은 뭘까

전화를 끊고 자동문을 통과한다

사랑에 열리는 것이 있다면 자꾸 열리는 문이나 있겠지


우리는 모르는 사랑의 모르는 열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것은 빛을 빌려 오기 좋은 매끈한 표면 빨갛고 작고 반짝이는 세 개의 동그라미 하나의 가지에서 뻗은 세 개의 초록색 줄기에 열린


전광판 속의 사람들은 사랑의 열매를 달고 있다

그것은 작고 분명한 물성을 갖고 옷깃마다 있다


누구나 결국 새로운 것에 끌린다**

나는 백화점 현수막 앞을 지나 을지로까지 걷는다


을지로에는 불가능한 구체화가 없으니까

을지로에는 무엇이든 다 만들어져버리니까


모습 다음은 낙후

완성된 모습에는 낡아가는 일만 남아 있다


도시에는 미래 대신 재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쇠냄새 종이 냄새 플라스틱 냄새 나무 냄새

가득한 문 대신


깨끗하고 목적이 있는 풍경이

명료하게 의도가 있는 사물이


사물과 우리 사이에는 눈이 놓여 있다

우리는 서로를 간섭하는 시선을 멈출 수 없다


새롭게 무수한 창문들이 우리를 본다


우리는 모습도 없이 있었다

우리는 자꾸 새로워지느라 죽지도 못했다


이미지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세계는 형태를 무서워해서 줄줄 흘러내린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중구난방 사랑을 하며 있었다


새로운 창문들이 빼곡히 붙어 서서 연결을 거부한다



*피에르 마리 벤트르

**신세계 면세점 2019~2020년 겨울 광고 문구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색채 속을 걷는 사람』,이나라 옮김,현실문화A,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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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투명도 혼합 공간』,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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