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 [신춘문예 - 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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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5,916회 작성일 21-09-06 19:45본문
2020 세계일보 문학평론 신춘문예 당선작
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
(중략)
모든 독자가 구체적인 언어로 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시를 읽는 순간 떠올린 이미지와 알 수 없는 직관으로 시를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랄까. 그런데 유독 시는 그렇게 즐기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좋다. 파편처럼 남은 단어를 좇으며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거워 시를 읽었지만, 어디 가서 시에 대해 떠들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은 갖췄다. 시에 대해 말하려면 꼭 10년 즈음은 진득하게 연구한 학자이거나, 파도 같은 감수성으로 눈물 한 방울쯤 찔끔 흘릴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예로부터 문학은 학문의 일종이었고 책은 지식과 사유의 산물이었으니까. 그에 맞게 대접해 드려야 예의이니까.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도 견고해, 새로운 장르의 독법을 살짝 빌려볼까 한다.
(중략)
시는 한 번 읽은 후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때 의미가 탄생한다고 한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 곧 시의 매력이지만, 그 함축적 매력은 문학을 어렵게 하는 데 한몫했다. 시는 다 읽어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 영역이 되었다. 한 번 읽어서는 모를, 그렇다고 두 번 읽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닌 미지와 난해의 세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자랑과 전복의 방식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멋과 멋없음의 구분을 흐려놓았을 때, 혼란이 가중된 가사를 수용자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의 독법을 빌리면 시의 독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냥 좋아 다 좋아
우원재가 부탁하면 다 좋아
그냥 가사 그냥 녹음
도움 되면 두 배로 더 좋아
비트 안 듣고 가사 먼저 써
그냥 정신줄을 놓아 노는 게 좋아
노는 게 좋아 뽀로로야
…
옷이 너무 좋아 안감
음악 너무 좋아 장난
고민 없이 그냥 마감 땡
(호불호 -feat 기리보이-우원재. 2019)
‘비트를 받고 20분 만에 썼다’는 사실에 주목을 받은 가사이다. 우원재의 「호불호」라는 노래의 피처링으로 들어간 짧은 파트인데, 노래의 전체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다. 호불호가 없으며 자신 있는 선택이 불가능한 데 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에 삽입된 가사는 아무 고민 없어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가사가 향유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게 이 가사는 유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이 가사에 큰 의미가 없음’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펀치라인을 살려 위트 있는 가사도 있지만, 그저 듣기 좋은 발음과 독특한 랩 메이킹에만 집중한 노래도 있다. 가사를 쓴 사람이야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리스너들은 의미 없는 ?없어 보이는- 가사를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발음과 리듬을 즐길 뿐이다. 이렇게 소리 자체를 즐기면 외국어로 된 가사까지 두루두루 즐기게 된다. 순간 가사는 도구가 되고 노래가 이루는 분위기를 즐기게 된다. 래퍼가 내는 소리 자체를 즐기고, 집중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 어느 날 문득 가사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노래를 즐겨 들어야 생기는 일이다.
시 또한 의미 없음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쓴다면 읽는 이도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한 구절 한 문장만이라도 마음에 들면 사람들은 그 시를 두고두고 읽는다.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두기 위해 의미를 해체해두는 것이라면 의미는 해체된 채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노래가 아니므로 특이하게 발음하거나 갑자기 음정을 바꿈으로써 재미를 줄 수 없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를 줄 수 있고 이에 따른 실험도 잇따를 수 있다. 시가 만드는 리듬은 갈수록 미묘해지고 있고, 시의 이미지 또한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실험 -그것이 형태주의적인 것이든, 새로운 퍼포먼스와 접합하든- 은 특별한 의미를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딱히 의미랄 것이 없는 상태, 의미를 발굴해 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다다라서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가 가능해진다. 글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 시 전체가 이루고 있는 이미지, 리듬, 분위기를 독자가 체화한다면, 머리를 써서 풀지 않아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가장 철저한 해체가 가장 고도의 설계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날 시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를 읽는 것은 깊이 있는 사유가 따르는 것이 미덕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는 오명을. 시 해석에 정답이 있고 이를 멋있게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오명 속에 시는 대중과 멀어졌다. 그러나 시의 창작자도, 문단에 소속된 사람도 아닌 개인으로서의 독자는 대중 속에 있다. 시의 오명을 벗겨내고 더 많은 이들이 시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시의 의미를 이해 가능한 만큼만 향유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그대로 두고 향유하자. 그러면 우당탕탕 애니메이션을 빌려 이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를 접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독자층이 다시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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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은 링크로 첨부했음
'현대시 읽기의 난해함'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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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백련님의 댓글
백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 보다는 난해한 문학이나 이야기를 읽을때마다 앨런소칼의 지적사기가 떠오름
그러면 시를 읽을때는 직관적으로 무엇을 의미한지는 바를 몰라도, 마치 그냥 팝송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것처럼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받아들일줄 알아야된다는건가?
지지님의 댓글
지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시를 더 소리내어서 읽자.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시에 대해 떠들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 이란 표현이 넘나리 확 와닿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