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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 [신춘문예 - 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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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912회 작성일 21-09-0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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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세계일보 문학평론 신춘문예 당선작

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 


(중략)


모든 독자가 구체적인 언어로 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시를 읽는 순간 떠올린 이미지와 알 수 없는 직관으로 시를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랄까. 그런데 유독 시는 그렇게 즐기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좋다. 파편처럼 남은 단어를 좇으며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거워 시를 읽었지만, 어디 가서 시에 대해 떠들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은 갖췄다. 시에 대해 말하려면 꼭 10년 즈음은 진득하게 연구한 학자이거나, 파도 같은 감수성으로 눈물 한 방울쯤 찔끔 흘릴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예로부터 문학은 학문의 일종이었고 책은 지식과 사유의 산물이었으니까. 그에 맞게 대접해 드려야 예의이니까.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도 견고해, 새로운 장르의 독법을 살짝 빌려볼까 한다. 


(중략)


시는 한 번 읽은 후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때 의미가 탄생한다고 한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 곧 시의 매력이지만, 그 함축적 매력은 문학을 어렵게 하는 데 한몫했다. 시는 다 읽어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 영역이 되었다. 한 번 읽어서는 모를, 그렇다고 두 번 읽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닌 미지와 난해의 세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자랑과 전복의 방식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멋과 멋없음의 구분을 흐려놓았을 때, 혼란이 가중된 가사를 수용자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의 독법을 빌리면 시의 독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냥 좋아 다 좋아
우원재가 부탁하면 다 좋아
그냥 가사 그냥 녹음
도움 되면 두 배로 더 좋아
비트 안 듣고 가사 먼저 써
그냥 정신줄을 놓아 노는 게 좋아
노는 게 좋아 뽀로로야

옷이 너무 좋아 안감
음악 너무 좋아 장난
고민 없이 그냥 마감 땡
(호불호 -feat 기리보이-우원재. 2019)


‘비트를 받고 20분 만에 썼다’는 사실에 주목을 받은 가사이다. 우원재의 「호불호」라는 노래의 피처링으로 들어간 짧은 파트인데, 노래의 전체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다. 호불호가 없으며 자신 있는 선택이 불가능한 데 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에 삽입된 가사는 아무 고민 없어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가사가 향유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게 이 가사는 유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이 가사에 큰 의미가 없음’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펀치라인을 살려 위트 있는 가사도 있지만, 그저 듣기 좋은 발음과 독특한 랩 메이킹에만 집중한 노래도 있다. 가사를 쓴 사람이야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리스너들은 의미 없는 ?없어 보이는- 가사를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발음과 리듬을 즐길 뿐이다. 이렇게 소리 자체를 즐기면 외국어로 된 가사까지 두루두루 즐기게 된다. 순간 가사는 도구가 되고 노래가 이루는 분위기를 즐기게 된다. 래퍼가 내는 소리 자체를 즐기고, 집중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 어느 날 문득 가사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노래를 즐겨 들어야 생기는 일이다.

시 또한 의미 없음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쓴다면 읽는 이도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한 구절 한 문장만이라도 마음에 들면 사람들은 그 시를 두고두고 읽는다.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두기 위해 의미를 해체해두는 것이라면 의미는 해체된 채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노래가 아니므로 특이하게 발음하거나 갑자기 음정을 바꿈으로써 재미를 줄 수 없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를 줄 수 있고 이에 따른 실험도 잇따를 수 있다. 시가 만드는 리듬은 갈수록 미묘해지고 있고, 시의 이미지 또한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실험 -그것이 형태주의적인 것이든, 새로운 퍼포먼스와 접합하든- 은 특별한 의미를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딱히 의미랄 것이 없는 상태, 의미를 발굴해 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다다라서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가 가능해진다. 글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 시 전체가 이루고 있는 이미지, 리듬, 분위기를 독자가 체화한다면, 머리를 써서 풀지 않아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가장 철저한 해체가 가장 고도의 설계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날 시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를 읽는 것은 깊이 있는 사유가 따르는 것이 미덕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는 오명을. 시 해석에 정답이 있고 이를 멋있게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오명 속에 시는 대중과 멀어졌다. 그러나 시의 창작자도, 문단에 소속된 사람도 아닌 개인으로서의 독자는 대중 속에 있다. 시의 오명을 벗겨내고 더 많은 이들이 시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시의 의미를 이해 가능한 만큼만 향유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그대로 두고 향유하자. 그러면 우당탕탕 애니메이션을 빌려 이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를 접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독자층이 다시 생겨날 것이다. 


------‐---


전문은 링크로 첨부했음

'현대시 읽기의 난해함'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듯

추천1

댓글목록

백련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백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 보다는 난해한 문학이나 이야기를 읽을때마다 앨런소칼의 지적사기가 떠오름
그러면 시를 읽을때는 직관적으로 무엇을 의미한지는 바를 몰라도, 마치 그냥 팝송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것처럼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받아들일줄 알아야된다는건가?

지지님의 댓글

profile_image 지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를 더 소리내어서 읽자.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시에 대해 떠들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 이란 표현이 넘나리 확 와닿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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