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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김금희 - 조중균의 세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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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작성자 지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457회 작성일 20-05-2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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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 (7)



5.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노 교수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노 교수는 나이가 많은 데도 회사의 계단을 한번 쉬지도 않고 올라왔다. 2주째 미뤄진 작업 때문에 내 정신은 이미 남동풍을 타고 먼 길을 떠난 뒤였다. 남동풍을 타면 북극해로 갈 수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 북극의 난폭한 곰처럼 마구 발톱을 휘둘러 연어나 물개 따위를 잡아먹고 싶었다. 노 교수가 돌아간 뒤 부장은 오늘부터 조중균 씨 작업량을 시간대별로 확인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다시 해란 씨에게 맡겼다. 부장은 언젠가부터 지시 사항을 나만 불러 따로 이야기했고 지금 진행 중인 책뿐 아니라 가을과 겨울의 작업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해란 씨의 경쟁자가 아닌 상사가 되어 있었다. 해란 씨는 내가 말한 문서를 만들어 가져왔다. 날짜, 시간, 작업 내용, 확인, 이렇게 칸이 나뉘어 있었다. 좋아. 내가 오케이 했는데도 해란 씨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돌아섰다.


 오후가 되자 조중균 씨가 천천히 걸어 내 앞에 섰다. 배앓이를 한 탓인지, 야근 때문인지 조중균 씨는 더 마르고 해쓱해 보였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어서 마치 거대한 물음표 같았다.


 “다른 사람 말고 영주 씨와 저 둘이서, 확인, 하지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의자를 끌어다 좀 더 가까이 갔다.


 “뭐라고요?”


 조중균 씨는 물기가 다 빠져나가버린 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셔츠 앞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거기 끼어 있던 만 원짜리들이 나풀거리며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2만 원이었다. 조중균 씨는 수첩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뭔가를 적은 다음 내밀었다. 날짜 옆에 괄호로 “2시 20분”이라고 적혀 있고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조중균 씨가 사인이 있는 칸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어떤 용도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설명은 없었다. 물론 거기에 뭐라고 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름을 적으면 됐다. 하지만 적을 수 없었다, 적고 싶지 않았다.


 “왜 적지 않습니까?”


 조중균 씨는 비난도 힐난의 기미도 없이 다만 아주 지친 듯이 물었다.


 “싫어요.”


 “왜 적지 않습니까?”


 나는 적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굶은 사람을 정수기 옆에 한 시간 동안 세워놓은 본부장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 일들과는 무관한 사람이니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조중균 씨는 가만히 서서 신발 코만 바라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한 시간 뒤 조중균 씨는 다시 내 앞에 와서 수첩을 내밀었다. 차라리 화를 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건방지다고, 너랑 나랑 나이 차가 얼마인지 아느냐고 욕을 하지. 이건 무슨 사람 피 말리는 짓인가.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수첩의 두 번째 칸에 쓰여 있었다.


 “왜 이러세요? 저한테 항의하시는 거예요?”


 “항의하는 것 아닙니다.”


 “그럼 뭐예요?”


 “확인을 원하는 겁니다.”


 조중균 씨는 물러서지 않고 볼펜을 내밀었다. 안 해요, 안 해, 손사래 치다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가 나서인지 당황해서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야, 저 팀, 살살해.” 서 대리가 요령 있게 한마디 하면서 사무실의 긴장을 깼다. “또 수첩인가, 무슨 일이야? 이번에는 뭐가 문제야?” 부장이 본격적으로 한마디 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할게요. 제가 해도 되죠?”


 해란 씨가 볼펜을 집어서 절뚝거리며 내 자리로 왔다. 그리고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을 잠깐 읽고는 옆에다 강해란, 이라고 적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660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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