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육호수 - 희망의 내용 없음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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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57회 작성일 23-04-07 16:19본문
희망의 내용 없음
우리가 우리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
더 많은 공기를 정화할
더 많은 허파가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더 많은 빙하를 녹일 더 많은 체온이
더 많은 어둠을 흡착할 더 많은 악몽이
더 많은 멸종을 지켜봐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사람인 채로 더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아
적막 속에 찾아오는 수치심은 아름다웠음
몸을 떠난 살은 몸보다 먼저 썩었음
희망의 내용 없음
여러 겹의 몸을
몸 위에 겹쳐지는 무수한 유령들을
허물로 남겨두고
밤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푸른 하늘 은하수 끝나지 않는 손장난
밤이 기어이 밤을 어기는 곳으로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
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내가 너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에서
울지 않고 기다릴게
거울에 갇힌 구름은 갈 수 없는 곳
어린 신의 어항 속
천사의 아가미를 달고
면벽의 안식 속에 감금되어
죽음과의 문답으로부터 소외되어
나의 굴레만을 나의 것으로
소유자 없는 나의 소유로 여기며
기다리는 이 없는 기다란
기다림
무색무취 수신자 없는 기도를
잇고 있을게
오래된 세계에서
지나치게 외로워서
지나치게 정직했음
영원에 진 빚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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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만한 물가
당신과 개울을 건너다 나는 알아버렸지. 살아서 건너야 할 개울이 이렇게 깊을 리 없다고. 그러나 당신이 앞으로, 앞으로 가자고 했으므로. 나는 앞으로갔다. 가고자 했으나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당신은 이곳으로,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당신이 험한 곳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으로 갔다. 가고자 했으나 닿지 않았다. 당신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만 향했으므로, 나는 혼자 돌아왔다. 돌아가고자 했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나를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며 당신은,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배웅했다. 배웅하고자 했으나 눈과 코와 입이 막혀 하지 못했다.
개울을 건너 당신은 돌아왔다. "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당신이 말할 때, 나는 알아버렸지. 산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우리가 쉴 만한 물가를 떠나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가 건너편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알리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당신과 나의 사이가 깊어서 누구도 살아서 그 사이를 건너지 못할 거라고. 나는 가고 있다. 발이 닿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 두려웠다.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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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코창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미잘을 보고도 네 생각이 났어
어젠 스노클링을 했어
위를 향해 벌린 대왕조개 입을
둥둥 뜬 채 한참 내려다보았지
무슨 말을 할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은 어딜 보아도 히피였지
흠 없는 히피였고
아무튼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마리화나는 치앙마이 것이 유명하대
이 말을 전해주려는 건 아니고
마음이 바닥났어
마음에 가라앉았던
주검들이 드러났더라고
그렇다고 주검들과 함께 누워
시체놀이를 한 건 아니고
론리비치에 나가
일광욕을 했지
마음이 바닥나서 이곳에 왔는데
통장 잔고도 바닥이 나버렸어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방비엥에선 아편도 판대
영어로 오우피움이라고 하면 알아듣는대
그렇다고 내가 방비엥에 가보겠다는 건 아니고
그게 꼭
통장 잔고 때문은 아니고
멍한 방에 누워 멍하니 있으면
고물 에어컨 소리가 파도 소리 같더라고
파도 소리에 맞춰 혼자 춤을 추는데
벽 속에서 누군가 끽끽 웃더라고
이제 내가 헛것도 듣는구나
약 같은 거 없이도 훌륭하구나 했는데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의 말에 따르면
찡쪽이라는 도마뱀이더라고
찡쪽이가 끽끽 웃은 거였구나 말했더니
끽끽 웃은 게 아니라 끽끽 운 거래
춤춘 거랑은 아무 상관 없고 원래 그냥 운대
원래 그냥 우는 애가 어딨어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울었겠지
그렇다고 이 말을 그 사람한테 했던 건 아니고
밤바다에 누워서 하늘 보면 북두칠성이
물음표로 보이더라고 바다 위 흔들리는
오징어 배가 더 별 같더라고 오징어 배를 보며 난
도망자가 아니라 목동 같고 이곳은
섬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초원의 한가운데 같고 매애애
흔들리는 별을 흔들리는 눈길로 쓸어보는 호수 같고
마른 우물을 내려다보는 목동의
까마득함도 알 것 같아서
옆에 누운 주검들도 다
마음 같더라고 마음이라서
주검이 된 것 같더라고
생각을 그치면 다시, 파도 소리 들려오고
들려오면, 난
주검들 사이에서 슬쩍 일어나
춤을 추지 춤추다
말을 잃고 집에 오지
잃은 말을 전하려 편지를 쓴다
그러면 너는
가능한 한 가장 먼 미래에서
시 읽는 사람
방비엥도 코창도 모르지만
지구 이야기 읽는 사람
히피가 대마법사가 되든
찡쪽이 드래곤이 되든
마음에 잠긴 주검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이 시를 읽는 마지막 인류
나는 입 벌린 대왕조개가 되어
물에 잠겨 사라질 말들을
편지 위에 풀어놓지
마음이 상하기 직전의 인류에게
사랑하는 헛것*에게
너를 떠올리며 나는 어려지고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끌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지옥이 있어
나는 어려지기만 해
기도도 욕망이라면
기도도 그만둘 거야
그나저나 어제 만난 코리안 히피도
가끔은 시를 쓸까?
시 쓴다고 하면 그 사람 그만 봐야지
스쿠터를 타고 섬의 동쪽으로 가서
해안선을 달리면
아카시아꽃 향기가 나
죽어보려 속도를 올리면
아카시아 태풍도 맞을 수 있어
*김언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난다,2019,이 시도 이별에 대해 말하지 말아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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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귀신같이 나를 찾고 나는 나처럼
도망쳤다
꿈의 결말에서
등에 맞은 탄환의 회전이
꿈 바깥의 몸에서 멎길 기다린다
나는 이제 나의 몸 속에 있고
출근 전까지
네 시간 잘 수 있다
얕은 꿈가
얇게 언 강을 네발로 조심스레 건너다
탕!
초침의 딸꾹질에 놀라 깨어나
맥박,
귓속에 갇힌 미치광이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
초침,
성벽을 오르는 병졸들이 발 디딘
동료의 어깨
초침,
물개를 쫓는 범고래의 자맥질
초침,
끈끈이에 걸린 시궁쥐의 뒤척임
맥박,
적막에서 태어나
적막으로 사라지는 중얼임들
세 시간 잘 수 있다
문을 열고 나섰는데
센서 등이 켜지지 않아서
한 손엔 라이터를
한 손엔 열쇠를 쥔 채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문 앞을 서성이며
간절해졌다
언젠가 숲길을 걷다
나를 보고 도망치는 들쥐를 보고
나도 같이 도망치고 싶은 적이 있었지
도망쳐서 여기고
여기는 아무도 없어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든
위로 향하는 계단이든
한 시간,
윤회하는 식물들의 자전주기
한 시간,
빈 제단을 맴도는 천사들의 공전주기
초침,
귓가에 퍼덕이는 비둘기 날갯짓
(나는 깨어난다)
초침,
울음을 참는 아이의 눈 깜빡임
(나는 깨어난다)
초침,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등을 미는 손
(아이는 깨어나지 못한다)
초침,
익사체에 다급히 불어넣은
살아 있는 이의 호흡
나는
식은 몸의 바깥으로 천천히
새어나가는 중
두 시간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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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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