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안희연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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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020회 작성일 22-11-25 16:23본문
표적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거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드니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거야
죽은
밟힌
눈만 그리면 완성될 그림을
수천장 가지고 있는 사람
서랍을 열면 황금빛 새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고
모두가 새의 황금빛을 이야기할 때
죽은 듯이라는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쓰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많다
창밖이 너무 환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너머의 너머를 바라보느라 진흙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사람
씨앗이라고 생각했다면 영원히 캄캄한
비밀이라고 믿어왔다면 등 뒤에서 나타나 당신을 할퀴는
소란스러운 기억이 얼굴을 만든다
파묻힌 발을 쓰다듬으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착을 모르는 시계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 이야기
/
시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흰 접시는 흰 접시일 뿐인데
깨질 것이 두려워 찬장 깊숙이 감추어놓고
흰 접시를 돋보이게 할 테이블보를 고르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제든 깨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말한다
듣고 있었을 텐데
그럴 때 이미 깨져버린 것
깨진 거나 다름없는 것
*
오래전 내게 흰 접시가 있었어
어느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숫가에서 발견된 총 이야기를 하듯이
흰 접시에 관해 말할 때가 있다
흰 접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흰 접시를 그리워하느라 평생을 필요로 하는 삶
그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
캐치볼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불타는 공이었다
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미리 아프려고
내 마음이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애거사 크리스티
/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르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
슈톨렌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첫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슈톨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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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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