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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모음] 안미옥 - 사운드북 外

    작성일 23-04-13 13:59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029회 댓글 0건

    본문

    사운드북 


    노래는 후렴부터 시작합니다 


    후렴에는 가사가 없어요

    사랑 노래입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모르겠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자꾸 번복합니다 


    주소도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엽서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나는 궁금합니다 


    꽃병에 담긴 물은 

    언제부터 썩을까 


    믿음을 강조하던 사람이 

    귀퉁이에 써놓은 작은 메모를 볼 때마다 알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꽃은 식탁 위에 뒀습니다

    활짝 핀 꽃은 마르면서 작은 꽃으로 자랍니다 


    말린 꽃의 온도로

    깨진 조각을 공들여 붙인 그릇의 모양으로

    오늘도 웃게 됩니다 


    어느 날엔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긴 울음은 이해가 되는데 긴 웃음은

    무서워서 


    이 꿈이 빨리 깨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왜 슬픔이 아니라 공포일까 


    이해는 젖은 신발을 신고 

    신발이 다시 마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어서 


    웃음은 슬프고 따듯한 물 한 모금을

    끝까지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깨어난 나는

    웃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열고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와요 


    사랑 노래입니다 


    그냥 배울 수는 없고요 

    보고 배워야 가능합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



    모자이크​


    ​동물원에 개는 없다

    아무도 개를 동물원에 두지 않는다

    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를 안고 동물들의 이름을 외웠다

    악어 호랑이 사자 살쾡이 뱀 멧돼지 사마귀 아나콘다 말벌

    이름은 무섭지 않다 마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무서워하기 내 오랜 버릇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잘 되진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같은 말을 반복한다

    보던 것만 보고 생각하던 것만 생각한다

    ​펼쳐진 페이지 위 한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짚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도 모르고

    ​무섭다

    ​미래를 반복해서 말하니까 미래가 진짜 있는 것 같다

    ​"이건 제 삶의 전부입니다“

    손가락으로 짚은 단어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놀이공원에서 풍선을 놓치고 돌아와

    풍선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전부라고 함부로 믿어버리겠지만

    매일 밤 손이 저려 잠에서 깨는 건

    주먹을 꽉 쥐고 다녔기 때문

    다시 잠들지 못하는 건

    오랫동안 지속하던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



    ​나는 전부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



    지정석 



    왜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을까


    귤을 만지작거리면 

    껍질의 두께를 알 수 있듯이


    혀를 굴려보면 

    말의 두께도 알게 될 것만 같다


    창틀엔 무수한 손

    의자 모서리엔 많은 무릎이 겹쳐 있다. 


    숨어 있는 의미를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못이 가득 쌓인 상자 안에서 

    휘어진 옷을 골라내면서


    생각한다 

    빗나간 망치가 내려진 곳을 


    두 귀를 세우고 뛰어가던 토끼가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처럼 


    앞니가 툭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붉어진 두 눈엔 이유가 없고 

    나의 혼자는 자꾸 사람들과 있었다 



    -----



    톱니​



    어린 나는 

    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


    무너지는 것이 습관이 된 줄도 모르고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더 크게 무너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주저앉을 마음이 있다는 건 

    쌓아올린 마음도 있다는 것 

    새가 울면 

    또다른 새가 울었다


    또렷하게 볼 수 있다면 

    상한 마음도 다시 꺼내볼 수 있을까 

    도마 위에 방치된 생선이나 

    상온에 오래 놔둔 두부처럼 

    상한 것은 따듯하고 

    상한 것은 부드럽게 부서진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남아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빛이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을 찢으며 들어간다 

    어린 나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손바닥이 열려

    흐른다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맞물리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덜 자란 나무는 따듯할 수 있다 

    한번 상하고 나면 다음은 쉬웠다



    -----

    출처

    『온』,창비

    『힌트 없음』,현대문학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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