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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모음] 김중 - 습작시대 外

    작성일 22-10-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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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74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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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작시대



    역광을 뚫고 느낌표 한 마리, 쿵쿵! 쿵! 나에게 왔다


    목 없는 드라이아이스가 김을 쏟으며 푸드덕 날아갔다


    광속으로 도는 창백한 팽이, 콘크리트 바닥을 뚫는다


    구멍난 상체를 일으키며 사격장 표적이 날 노려볼 때


    대가리를 틀어막은 코르크 마개들은 폭죽처럼 터졌다


    목마른 이파리를 흔들며 칼춤 추는 미친 나무들아


    저기 관을 뚫고 자라나는 건 머리칼이냐 뿌리냐?


    구워......버린 뱀이, 도막도막 달빛에 빛날 무렵


    땀구멍 없는 육신들은 발작적으로 술을 토하고


    취한 고참, 소반을 뒤집으며 착한 년의 뺨을 친다


    흙탕물 속에서 힐끗 잠수교가 드러나는 저 장관!


    여관장 TV 앞에 엎드려 마감뉴스를 보는 너


    모르는 너의 마른 등허리에 나는 손가락으로 썼다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리고 그림자


    간지럽다며, 너는 내 옆구리를 우수수 뜯었겠지만



    /



    세바스토풀 거리의 추억



    태엽이 돌아가며 인형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은밀한 회상 속으로 나는 끌려 들어갔다


    바이올린은 높은 도에서 온종일 떨었고


    흰 머리칼 휘날리며 빨간 눈을 치켜뜨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근두근


    저주해 사랑해 저주해


    끝없음과 끝없음이 지상을 스쳐 잠시 만날 때


    빛이 끌어내는 색깔의 형식으로 신음하는 사물들


    어둠 속에 뿌리 내린 식물들의 신성한 마비와


    심연 위에 펼쳐지는 미로의 얼굴 얼굴들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은 알지만


    그 끝이 무언지 결코 모르지 않던가?


    시를 읽으면 앉은뱅이 벌떡 일어나고


    시를 읽으면 광인이 맑은 눈빛으로 엉엉 울고


    시를 읽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나, 일곱 원소로 분해되어 이렇게


    당신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데…



    /



    천사



    가진 돈을 다 털어 거지에게 주고 돌아서면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아마 그때 나는 몹시 '영웅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이런 짓 따위로 세상이 변하겠느냐마는, 치졸하기 그지없는 만족이지만은, 그래도 아직 통장에 돈이 좀 남았다는 계산이지만은, 사심 없이 흐뭇하여 피운 담배가 핏속으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왼쪽 가슴에서 한 모금의 니코틴을 매복하던 암세포가 깨어나 나는 덜컥 암에 걸린다. 心腸癌, 으악! 인간을 어설프게 동정하지 말지어다……어찌되었건, 그자는 내가 준 돈으로 술 한 병과 저녁 한 끼를해결할 것 아닌가?


    이렇게 위안하는 자는 영리한 사람.


    사실, 사람은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죽는것. 죽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예감 속에서 이미 죽는 것. 암이 받아 마신 니코틴은 즐거운 니코틴이므로, 암은 스스로 독을 풀고, 평온하고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는 한층 더 영리한 놈.


    부랑자를 스쳐 지나가면서, 가진 돈을 다 털어 줄까망설이다 귀찮아, 발길을 재촉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양철 깡통은 텅 비어 있었고…… 인간으로 위장한 저 천사에게 (자신이 위장한 천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지에게) 공물을 예배할 기회를 또 한 번 놓쳐버린,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몹시 대견해하며 그 신성한 거리를 부지런히 빠져나갔다.



    /





    벼락이, 하늘과 땅을 찢어 이으며, 길 하나 불 질러 놓았다. 아무도 가지 못하는...... 저 불타는, 울부짖는, 눈 먼......길 하나.



    /



    거품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기 싫었고


    좋아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고여 있다


    풍경에는 추억이, 애인 가슴에는 미움이


    어머니 속엔 희망이, 영혼에는 광기가......고여있다


    늪과 연못이 평화롭다는 생각은 가벼운 서정으로


    용서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흐름에 몸 맡기고 사는 것들은 얼마나 비열한가?


    지하에서 혼자 썩는 것들은 또한 


    얼마나, 얼마나 오만한가?


    비열하기 싫어 썩고 오만하기 싫어 흐르고 싶은


    저 비열하고 오만한 것들은 그리하여


    떠오른다


    무서운 암흑에서 혼자 부대끼다가


    탄식처럼 가슴 아프게 가끔


    더러운 거품 한 방울 수면에 솟아오를 때......


    그 옹송그린 가슴에 끌어안은 푸르고 비린 하늘



    ---------


    출처-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 문학과 지성사


    [이 게시물은 지지님에 의해 2023-02-17 14:30:53 문학, 서사 / LITERATURE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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