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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모음] 최승자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外

    작성일 22-06-14 17: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백인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905회 댓글 1건

    본문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네게로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


    일찍이 나는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여자들과 사내들

    -김정숙에게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사내의 눈물 한 방울

    망막의 막막대해로 삼켜지고

    돌아서면 그 뿐

    사내들은 물결처럼 흘러가지만,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 질 무렵

    길고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랑,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희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


    외로운 여자들은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



    담배도 끝나고

    커피도 끝나고

    술도 끝나고

    목숨도 끝나고

    시대도 끝나고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

    아버지 어머니도 끝나고

    삼각 관계도 끝나고

    과거도 미래도 끝나고

    이승도 저승도 끝나고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

    아- 영원한 단식만이 있다면.

    아- 영원한 無의 커튼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텅 비어 있다.

    텅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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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백작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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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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